경제적 수단과 지정학의 상호작용… ‘지경학’의 개념과 유래
지정학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경제적 수단을 동원하거나 지정학적 영향력이 경제적 성과로 이어지는 구조를 뜻하는 ‘지경학(Geoeconomics)’ 또는 ‘지경학적 권력’이 글로벌 경제의 핵심 키워드로 부각되고 있다. 지경학에 대한 보편적인 단일 정의는 없으나, 대개 지정학적 목표 달성을 위한 경제적 수단의 사용이나 지정학적 힘의 과시가 경제적 성과에 어떻게 활용되는지 설명할 때 사용된다. 넓게는 국제 경제, 지정학, 국가 전략 간의 상호작용을 포괄한다. 이 용어는 1990년 전략학자 에드워드 루트왁(Edward Luttwak)이 냉전 이후 군사력의 중요성이 줄어들고 지정학이 지경학적 권력 경쟁으로 바뀌고 있다고 주장한 논문에서 기원했다.
지경학은 각국 정부가 자국의 경제력을 활용해 지정학적·경제적 목표를 달성하는 주요 도구로 활용되어 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기 동안 미국은 소련(USSR)의 군사력을 제한하기 위해 서독, 프랑스, 영국 등 17개국과 협력하여 대공산권 다자간 수출 통제 조정위원회(COCOM)를 설립했다. 이를 통해 공산권 경제상호원조회의(COMECON) 소속 국가들에 경제 제재를 시행했다. 코콤은 공산권 몰락 이후 1994년 3월 31일부로 기능을 중단했으나, 이후 바세나르 협정(Wassenaar Arrangement)을 통해 수출 통제가 이어지고 있다.
금융 시스템과 교역 무기화… 역사 속 지경학적 권력

지경학적 권력의 영향력은 상품 교역 제재에만 국한되지 않고 글로벌 지불 시스템에서도 등장했다. 1971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달러화 금태환 중단을 선언한 이후 복수 통화를 이용한 국제 금융 거래가 급증했다. 당시 미국의 퍼스트내셔널시티은행(시티은행 전신)이 새로운 글로벌 메시징 표준을 개발했으나, 유럽에서는 미국의 단일 대형 금융기관이 국제 결제 시장을 장악할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었다.
이에 미국과 유럽 은행들은 타협안으로 컨소시엄을 구성해 1973년 국제은행간금융통신협회(SWIFT)를 설립했다. SWIFT는 현재까지도 특정 국가나 세력에 대한 차단 협박을 통해 강력한 효력을 발휘하는 지경학적 권력 행사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안보와 경제의 불가분성… 변혁기를 맞이한 글로벌 경제
1990년 동서독 통일과 1991년 구소련 붕괴로 냉전이 종식된 후, 서방 국가들은 상당 기간 경제 정책과 국가 안보를 분리할 수 있는 환경을 누렸다. 국가 개입을 최소화한 자유시장경제 속에서 기업과 자본은 세계화에 매진했다. 미국 정부와 의회가 중국의 지식재산권 침해와 과잉 생산 피해를 경고했음에도, 미국 기업들과 금융회사들은 대중국 투자와 자본 투입을 확대했다.
그러나 미·중 간 본격적인 패권 경쟁,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공급망 혼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중동 전쟁 충격 등이 겹치면서 경제 정책과 안보 정책의 분리는 불가능해졌다. 산업 정책의 등장, 민간 기업에 대한 정부 소유 및 영향력 확대, 산업 전체와 은행을 재편하는 광범위한 제재 조치 등 막대한 비용과 고통을 수반하는 의사결정이 일상화되고 있다. 딜로이트(Deloitte)에 따르면 주요 경제 전문가들과 정부, 기업들은 미국 주도 자본주의 역사 내내 지경학이 일반적인 현상이었으며, 지난 30여 년간의 세계화 열풍이 예외적인 시기였음을 뒤늦게 확인하고 있다.
